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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잊고 있던 종이접기가 이토록 큰 감동일 줄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훌쩍 커버린 동안에도 묵묵히 종이를 접어온 김영만 원장이 이끈 감동이다.

 

아이들 눈높이로 전하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고달픈 어른아이에게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온다.

1988 10 21, 아이들의 시선이 모인 브라운관에 낯선 아저씨가 등장했다. 색종이를 들고 무엇이든 뚝딱 접어내는 아저씨. 신기하고 재미난 종이접기 아저씨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2015 7 12, 젊은이들의 시선이 쏠린 모니터에 낯익은 아저씨가 등장했다. 색종이를 들고 무엇이든 뚝딱 접어내는 아저씨. 기억 속 어딘가에 있던 종이접기 아저씨가 다시 나타났다.

색종이를 잊은 지 오래, 종이접기가 시시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20~30대 ‘코딱지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주름만 몇 개 늘었을 뿐 여전한 목소리로 색종이를 꺼내드는 김영만 원장을 보기 위해서다. 무조건 ‘빨리빨리’ 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무엇이든 알아서 해내야 하는 어른들은 색종이 접는 방법, 가위질하는 방법 하나까지 차근차근 일러주는 그 시절 종이접기 아저씨가 반갑기만 하다.

“다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데, 저는 늘 그 자리에 있었어요. 1988년 처음 방송할 당시의 꼬맹이들이 훌쩍 커서 어린이 TV를 안 보게 됐을 뿐이죠. 저는 여전히 아이들과 종이를 접고 있었답니다. 체험 미술관도 세우고, 전국에 강의도 다니고… 종이접기로 바쁘게 지냈지요.

 

‘코딱지들’을 대표해 김영만 원장을 만나러 나선 사내기자 허하미 대리. 천안의 한적한 농가 사이에 자리 잡은 체험 미술관 ‘아트오뜨’에 들어서자 김영만 원장이 반가이 맞이한다. 어느덧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됐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색종이와 함께하는 그는 색종이 작품들로 알록달록한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처음 <마이 리틀 텔레비전> 섭외가 들어왔을 땐 거절했어요. 젊은이들이 보는 예능 프로는 망가지길 원하잖아요. 저는 교육자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요. 더구나 인터넷으로 3시간 동안 실시간 중계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위험한 방송이에요.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이 종이접기를 좋아할는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런데 ‘채팅’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때 그 코딱지들이 어떻게 자랐을지, 어떤 반응을 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딱 종이접기만 하기로 하고 출연을 결심했지요.” 그렇게 예전처럼 종기접기 수업을 했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추억만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를 위안과 감동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늘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는 김영만 원장특유의 소통 덕분이기도 했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불렀던 애칭 ‘코딱지들’이라는 한마디에 울컥해지고, ‘쉽다’고, ‘모두가 잘할 수 있다’고 다독이는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어쩐지 ‘내 편’처럼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게 ‘이젠 어른이 됐으니 잘 따라 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건넨 반가운 인사이자, 응원이자, 애정 표현이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그동안 뒤돌아볼 날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잖아요.

‘종이접기’라는 추억을 통해 모두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됐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수많은 댓글을 통해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젊은 친구들한테 위안을 받는 60대라니,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죠.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알게 된 젊은이들에게 그저 따라만 하면 근사한 작품이 완성되는 종이접기는 얼마나 행복한 추억이던가. 내 뜻대로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지는 ‘참 쉬운 것’은 그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 지친 우리를 다독였다.

 

꿈 꾸는 사람은 늘 행복하다

김영만 원장은 젊은이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며 스스로를 산 증인으로 내세운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고, 계획한 사업은 무산된 상황에서 반 백수로 지내던 그가 우연히 일본에서 만난 게 종이접기였다. “친구 집에 얹혀 지내면서 친구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곤 했는데, 그때 유치원에서 종이접기를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낯설면서도 흥미로웠죠. 귀국해서 한국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알아보니 종이접기를 가르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더군요. 주입식 미술 교육뿐이었어요.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었는데, 1년 기한을 두고 도전했지요. 운 좋게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 자리를 얻게 돼 조형미술 커리큘럼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색종이 수업을 해보자고요. 처음엔 거절했지요.

당시 서른아홉이었는데,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오기엔 너무 나이가 많잖아요. PD의 삼고초려에 딱 일주일치만 녹화했어요. 그런데 방송이 끝나자 왜 더 안 나오느냐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친 거죠. 그게 <TV유치원 하나둘셋>이에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소중한 프로그램이죠.

김영만 원장은 늦은 나이에 종이접기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온 자신도있다며,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는 수업시간에도 ‘하지마’ ‘안 돼’ ‘못해’ 같은 부정적인 말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어렵지 않아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참 쉽죠’와 같은 말을 자주 쓴다.

“보통 6~7세 아이들과 주로 수업을 하는데, 제 벨트를 툭 치고 지나가는 아이가 있어요. 저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신호죠. 색종이를 막 구겨서 토끼라 우기는 아이는 창의성이 좋은 거예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자유로운 영혼인 거죠. 그런 개구쟁이들이 나중에 더 크게 자란다니까요. 공감을 빼고 소통하면 싸움 나요. 아이들한테 너무 많은 걸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먼저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꾸짖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눈높이에서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님. 그는 종이접기 아이디어도 10명 중 7명 정도가 따라 할 수 있는 정도라야 아이디어 노트에 정리한다. 그렇게 그는 아이들 눈높이와 함께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공룡이며 꽃이며 공중에서 빙글빙글 내려오는 헬리콥터며 그의 손끝에서 1~2분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뚝딱 탄생한다. 조금 비뚤게 접어도 신경 쓰지 않고, 가위 대신 침을 발라 종이를 가르기도 한다. 김영만 원장은 지나치게 완벽할 필요가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대신 종이접기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색종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봉사활동에 나서는 이유도 이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서다.

 

“일 년에 두 번씩은 개인적으로 보육원을 찾습니다. 종이접기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즐기지요. 종이문화재단을 통해서는 해외 봉사활동을 떠납니다. 필리핀, 몽골 등 개발도상국은 종이접기 불모지거든요. 그곳에서 강사를 육성하는 재능 기부를 하고 있어요. 초반에는 처음 보는 색종이가 아까워 안 접더라고요. 풀도 안 쓰고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2개씩 준비해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게 했죠. 종이접기를 더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을 느껴요. 11월에는 일본에 있는 한인 국제학교에서 자격증 과정을 열 예정입니다.

 

그는 이미 많은 꿈을 이뤘다고 말한다. 미술관을 열었고, 젊은이들과 눈물의 대화를 나누는 멋진 경험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많이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사정이 좋지 못한 분교나 도서지방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달려갈 준비가 돼 있으니 주저 없이 연락을 달라고 말한다. 이토록 따뜻한 마음으로 접은 토끼, 개구리, 나비, 비행기…. 우리는 어쩌면 그와 함께 꿈을 접고 희망을 접어왔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종이접기가 더 많이, 더 멀리 퍼지길 바란다.

 


출처 : SK주식회사 C&C 사보 ‘Create & Challenge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