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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글씨를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명품(名品)이다. 캘리그라피의 매력은 세상에 하나뿐인 글씨를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글자를 비슷하게 쓸 순 있어도, 똑같이 쓸 순 없어요.” 이름만 들어도 너무나 친숙한 <불멸의 이순신>, <영상앨범 산>,<그들이 사는 세상>, <신데렐라 언니>,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현재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현장르포 동행>, <진품명품>, <여유만만>, <굿모닝 대한민국> 등의 방송 타이틀을 만든 KBS 아트비전 영상그래픽팀 디자이너로 재직 중인 캘리그라퍼 김성태씨이다.

 


서예로 시작해 캘리그라퍼가 되기까지

캘리그라퍼가 되기 전 그는 서예가였다.  붓을 잡기 시작한 때는 겨우 6. 배경에는 부친의 서예사랑이 있었다. 1976년 경상남도 거창에 서실(지금의 서예 교습소)을 만든 아버지에게 그는 1호 제자였다. 유년시절부터 붓과 함께한 생활은 초등학교 시절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게 해 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진주 개천 예술제라는 전국대회에 출전했었죠. 전 당연히 그곳에서도 제 실력이 출중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반대였죠. 당시 함께 출전했던 학생들의 실력은 과히 감탄 그 자체였죠. 최종 입선(入選)을 하긴 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이었죠. 대회를 마치고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3일을 앓아 누웠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동안의 안일한 생각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989년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서예과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로에 대한 망설임 없이 입학을 했다.

 

 

입학 당시 서예과가 생겨 너무나 기뻤죠. 이제 꾸준히 한 길로 나가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죠. 하지만 서예에 대한 애착이 커질수록 더욱 깊은 고민에 빠져 들었죠. 너무나 글씨가 안돼서   . 종이할 거 없이 다 집어 던지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하하

좁은 분야로 인한 진로 고민으로 이해했지만 그에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당시 서예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중국의 왕희지 그리고 당 3대가인 구양순 . 안진경 . 저수량과 같은 사람들이었죠. 서예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그들의 글씨를 따라 써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려웠어요. 글자를 보고 그대로 베껴 쓰는데도 도대체가 안 되는 겁니다. 너무나 괴로웠어요.” 당시의 고통을 회상하면서 그는 웃었다.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분야가 바로 서예라면서

 

 

대학 졸업 후 교수의 꿈을 품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서예가로서 후학을 양성의 길을 원했지만, 당시 서예과가 전국에 몇 군데 없을 뿐더러 좁디 좁은 교수의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일보다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느날 TV에서 대하드라마 <용의눈물>을 보면서 방송타이틀작가의 꿈을 꾸게 됐고, 2003 5월에 KBS아트비전 공채로 입사를 하게 되어 캘리그라퍼로서 새로운 인생의 문을 두드린다.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진화시키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캘리(Calli) ‘아름답다와 그라피(Graphy) ‘쓰다, 그리다가 합쳐 만들어진 말로 아름다운 글씨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선 외국인에게 서예를 소개할 때 표현한 용어였는데, 캘리그라피가 21세기에 들어와서 IT의 발달과 더불어 광고시장에서 찾기 시작하고 또 한류 바람이 불면서 많은 이들이 상업적인 글씨를 쓰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캘리그라피 또는 캘리그라피디자인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사설 교육기관에서부터 문화센터에 이르기 까지 그 수요가 많이 늘었지요. 서예는 캘리그라피의 뼈대라고 할 수 있어요. 기초 서예가 잘 닦여 있어야 훌륭한 캘리그라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캘리그라퍼의 80% 이상은 서예를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서예는 캘리그라피의 중심 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진 좌 : 순수 서예 작품 예시 사진 우 : 캘리그라피 작품 예시 출처 : http://www.kbstitle.co.kr/

 

우리가 알고 있는 캘리그라피는 서예와 유사하다. 디자인의 한 분야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그라피는 서예보다 광범위합니다. 서예는 캘리그라피의 일부라 볼 수 있죠. 예를 들면 CI . BI . 북 커버 . 영화/방송 타이틀 . 슬로건 . 퍼포먼스 등 모든 분야가 캘리그라피에 속할 수 있지만 서예는 한글 . 한문과 같은 글자에 한해 정형화된 형태를 고집합니다. 또한 캘리그라피는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죠. 어떤 재료를 사용하던 관계가 없습니다. 나무젓가락으로 쓰도 그 표현하는 대상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으면 됩니다. 반면에 서예는 문방사우[文房四友]만을 고집합니다.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예는 전통을 중시하고 글자나 문장에 담긴 정신을 중요시 여기기에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된 캘리그라피의 출처: http://www.kbstitle.co.kr/

 

그는 어느 하나가 좋고,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다. 캘리그라피는 광범위하지만 얇고, 상업성을 지닌 반면에 서예는 좁지만 깊고 상업적이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는 서예가 좀 더 대중 속으로 파고 들게끔 캘리그라피에 적절히 접목했다.

 


자아성찰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성태씨는 서예보다 방송타이틀로 더 유명하다. 어쩌면 방송타이틀이 그를 시장에서 팔릴 수 있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방송타이틀이 유명해지면서 업무 외 다른 일도 병행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고 서예 실력이 부족하여 방송타이틀 분야로 전향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학창시절부터 서예공모전을 통해 성실하게 실력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 후 2006년도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문부문으로 초대작가 되고 이듬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부터 김성태씨는 서예가와 캘리그라퍼의 경계를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쌓인 경력이 현재 개인전 및 초대전 6, 단체전 100여 회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중진작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2011년 법정스님 1주기 추모 기념 법정 스님의 죽비소리입니다. 당시 전시 기간 내내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지요.

 

 

1.25m폭에 높이 5m의 발자국을 찍은 작품을 설치하고 그 옆에 흰 고무신 두 짝을 가지런히 놓아 두고 제목을 스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했지요 전시 오픈 후 관객들의 반응이 절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어요. 그 모습들에서 전시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죠. 당시 법정스님의 인기가 식지 않았던 면도 있었지만, 관객들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 앞으로 어떤 전시를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새로운 학습을 한 전시였지요.“ 이 전시는 토포하우스가 문을 연 이후 최고 관객들이 몰린 전시로 남았다고 한다.

 

김성태씨의 홈페이지에 가면 법정스님의 죽비소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http://www.kbstitle.co.kr/gallery_11.html

 

김성태씨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쓴 글이 아닌 명인들의 글을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가 궁금했다.

법정스님 글로 전시를 준비할 때는 막연한 슬픔이 교차되어 시작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전시를 마칠 때 제 가슴 속 깊이 큰 도량(度量)이 생겼습니다. 이후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글과 앞으로 준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쓸 때 더 큰 기대를 갖게 되었죠. 명인들의 글귀를 옮길 때 단순히 알려진 글만 선택하진 않아요. 명인과 관련된 자료와 서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합니다.그렇게 철저히 준비한 후 작품으로 만들 글귀를 선택하죠. 그리고 글귀에 담긴 의미와 깨달음을 생각하며 글자를 완성해 갑니다.“ 전시를 통해 명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언제나 감동과 대중에게 귀감을 줄 수 있다며 뿌듯한 모습이었다.

오는 4월 인사동 선화랑에서 또 한번의 개인전을 연다. 이번에는 만인의 어머니이신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다. 작품을 준비하는 그의 정성과 노력이 어서 빨리 4월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했다.

전시는 제게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다주고, 더 나아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전 이걸 힐링캠페인이라 부르고 싶어요.” 

 


자연이 살아 숨쉬는 산소 같은 캘리그라퍼 장천 김성태

김성태씨 홈페이지(http://www.kbstitle.co.kr/)에 방문하면 자연이 살아 숨쉬는 산소 같은 글씨 캘리그라피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보자면 아름다운 서체라 할 수 있지만,그가 말하는 의미는 새로웠다.

어떤 단어를 캘리그라피로 표현할 때 그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 ‘바다라는 단어를 쓸 때면 글자에 바다가 지닌 생명력을 담아야 할 것이고, ‘이라는 글자를 쓸 때는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함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자연이 살아 숨쉬는 산소 같은이란 말을 쓰게 되었고, 쓰는 글자마다 생명과 산소가 담길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전 제 글씨가 대중에게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방솔타이틀 "찔레꽃과 불멸의 이순신" http://www.kbstitle.co.kr/

 

TV 소설 찔레꽃

KBS아트비젼에 입사하고 처음 제작한 드라마 타이틀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대하드라마불멸의 이순신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간 작품이라 했다. 첫사랑의 설레임처럼 처음 맡은 업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뭍어 난 작업이었던 것이다. 서예로 시작하여 현재 캘리그라퍼로 활동하지만,  먼 미래에 대학에서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를 함께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인서구노(人書俱老)

붓을 잡은 지 39……

당나라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에 인서구노(人書俱老)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나 글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경지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월을 이겨낸 공력(功力)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추사 김정희선생이야 말로 인서구노(人書俱老)라는 말과 가장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초기 때부터 글자에 대한 공력(功力)은 그 어떤 서예가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그 어떤 서예가들도 견줄 수 없는추사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인서구노(人書俱老)는 멀고도 먼 학문과 예도(藝道)의 길이므로 인간의 성숙과 더불어 글씨가 무르익는다고 하는 의미를 늘 되새겨 본다고 했다. 사람이 늙는 것이지, 글씨가 늙어 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생을 산 만큼 깊어진 만큼 글씨가 깊어지고 무거워진다는 희망을 가지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자세로 임하면 김성태씨 또한 추사 김정희 선생에 버금가는 캘리그라퍼이자 서예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그의 작품들이 대중과 소통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힐링이 될 수 있는 캘리그라피로 발전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천 김성태 선생님께 SK C&C 블로그를 위해 특별히 글을 써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