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딴짓’은 부정명사였다.

그런데 이기진 교수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창의의 시작이라며 적극 권장하고 나선다.

교수가 ‘딴짓’을 권하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기진 교수를 만난 곳은 서촌 외딴 골목에 자리한 ‘창성동 실험실’. ‘실험실’이라기에 고등학교 과학실을 상상하며 들어섰는데 웬걸! 앞마당엔 민트, 바질, 콩이 자라고 있고 벽에는 익살스러운 그림들이 걸려 있으며 그는 제자와 함께 감자전을 부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실험실’의 탈을 쓴 그의 놀이터였다. 엉겁결에 젓가락을 집어 든 이유경 사내기자는 이기진 교수가 찢어준 감자전 한 조각을 오물거리며 둘러본다.

 

장난감 라디오, 아프리카에서 공수해온 장식품, 예스러운 한옥 창이 묘하게 어우러진 신기한 풍경이다. 이기진 교수는 마이크로웨이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물리학자다. 국제 저널에 1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학술 활동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혈류에 전파를 쏴 혈당을 측정하는 ‘마이크로웨이브 혈당 측정 기술’을 개발해 세계지적재산권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그를 가수 2NE1의 ‘씨엘 아빠’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는 따로 있다. 바로 ‘딴짓의 고수’다. 보통 맡은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어 보이는 행동을 두고 ‘딴짓’이라 하는데 ‘교수님’에게 어쩌다 그런 수식어가 붙게 됐을까?

 

⊙ 머리를 비운다는 것

 

그는 ‘깍까’가 주인공인 동화를 8권이나 펴낸 동화작가다. 틈틈이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연 화가이기도 하고, 온갖 잡동사니를 모으는 수집가 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심심풀이로 만든 도자기 로봇을 파리 아트 페어에 출품하며 공예가로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 로봇은 프랑스 유명 배우 에릭 쥬도르가 거금을 주고 사갔다. 정말 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행보다.

 

“두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짧은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글쓰기에 흥미가 생겼어요. 그래서 좋은 이야깃거리가 떠오를 때마다 기록했죠. 그렇게 글이 쌓이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됐어요.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어린 시절 낙서를 즐겼는데, 계속하다 보니 어느 정도 작품 꼴을 갖추더라고요. 그래서 전시회를 열었어요. 로봇 제작도, 골동품 수집도 모두 재미있어서 시작했어요.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일’을 자꾸 삶에 남겨놓는다는 것이 언젠가부터 불편하더라고요.”

 

흥미로운 일에 과감히 뛰어들고, 한 번 뛰어든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다방면에 걸쳐 ‘쟁이’가 돼 있었다. 본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구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며 입체적으로 사고한 덕분에 과학적 현상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생겼고, 색다른 실험도 주저하지 않고 시도해본다. 그런 과정에서 떠오르는 창의적인 연구 발상은 덤이다. 이렇듯 이기진 교수는 부정적으로만 사용됐던 ‘딴짓’을 긍정의 단어로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이유경 사내기자도 ‘딴짓’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공감한다. 그녀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여가를 보내는 취미 예찬론자다.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라이딩 등 주로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는데 때때로 요리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그녀의 말에 이기진 교수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저 역시 한때는 집에서도 논문을 쓰고 연구 서적을 읽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연구실 밖을 나서면 절대 일 생각은 안 합니다. 물론 일에 많은 시간을 쏟으면 조금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겠죠. 하지만 경험상 그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집중도가 높은 시기에 바짝 몰입해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머리를 비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씁니다. 그래야만 일과 삶, 두 영역 모두에서 롱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떻게 하면 일도 훌륭히 해내고 인생도 즐겁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한 그는 자신만의 ‘딴짓 황금 비율’을 만들었다. 시간, 에너지, 노력 등의 49%는 일에 투자하고 나머지 51%는 일 외의 활동에 쏟았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이다.

 

⊙ 남다른 삶이 개성을 만든다

 

하지만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딴짓’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정말 해도 되는지 두렵다. 괜히 뒤처지거나 시간을 낭비할까봐 걱정이 앞선다. 이기진 교수는 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은 두 가지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어린 시절 신나게 놀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설정해놓은 ‘탈선’이라는 경계에 가로막혀 제한된 자유만 누리다 보니 놀 줄 모르게 됐다. 또 다른 하나는 만연한 ‘끝장주의’ 때문이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는 이상한 부담감 때문에 섣불리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지 못한다. 이러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매일매일 작은 도전이 필요하다. “시간을 압축해 바라보면 세상은 어디나 혁신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압축된 혁신은 매일매일 일상에서의 생각과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경직된 삶에서 즐기는 삶으로 혁신하려면 지금 내가 관심 있는 것들, 지금 나에게 흥미를 주는 것들을 조금씩 즐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역시 처음부터 ‘딴짓’에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의 30대는 온통 연구와 실험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교수를 준비하던 그 시절엔 24시간 전공 서적만 들여다봤다. 그렇게 10년을 노력한 결과 교수가 됐고, 그때부터 조금씩 삶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10년간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딴짓’을 제대로 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치열한 몰입 경험을 바탕으로 ‘딴짓’의 가치를 발견하기까지, 55년의 세월을 거치며 비로소 일과 삶의 조화를 맞추게 된 그는 SK C&C 구성원에게 힘주어 조언한다. 지금과 같은 초경쟁 시대엔 ‘딴짓’이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그러니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즐기라고 말이다.

 

“대학 시절, ‘물리학과 학생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공부보다 미술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전공 수업보다 문과대 강의를 더 많이 들었으니 당연하죠. 물리학 교수인 지금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아요. 하지만 남들과 다른 물리, 남들과 다른 연구를 하려면 남다른 생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모습이 주류에서 비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남을 의식하고 남과의 차이를 좁히려 들 때 삶은 개성을 잃는다는 점입니다. 일 외의 영역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마세요. 분명 새로운 영감을 얻어 일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삶에 활력이 생깁니다.”

 

이날 인터뷰를 마친 이기진 교수는 연구실을 청소하러 학교로 떠났다. 이 역시 취미 중 하나인데, 어지럽게 쌓인 책들을 책꽂이에 꽂고 책상 위에 있는 논문들을 정리하다 보면 ‘발견의 시간’이 된다. ‘이런 게 여기 있었다니!’ 하면서 즐기는 시간으로 변한다. 이렇듯 ‘딴짓’의 바탕은 모든 순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부터 출발한다.

 

 

▶ 사내기자 취재수첩

 

이유경 대리가 이기진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Q ‘딴짓’하는 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꼭 지키는 원칙이 있나요?

 

A 연구실 문을 닫는 순간부터 일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기한에 맞춰 맡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죠. 수업 준비, 프로젝트 실행, 연구비 마련 등 해야 하는 일을 제때 잘해냈을 때만이 자유롭게 한눈을 팔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과감한 결단도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포기할 것이냐, 처리할 것이냐를 빨리 결정합니다. 제 삶의 기준과 스타일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Q '창의’를 발휘하고자 하는 SK C&C 구성원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TV’와 ‘소파’를 멀리하세요! 그 두 가지만 피해도 보다 풍부한 경험, 열린 사고를 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일’을 경계하세요. 일에 삶이 매몰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퇴근 후에는 ‘나는 백수다’라는 생각으로 업무 외에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에 몰두해보길 권합니다.

 

 

♣ 출처 : SK C&C 사보 'Create & Challenge' 7월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티스토리 툴바